‘옥저와 동예’의 이야기
이 블로그에서 다루는 이야기의 출처는 '나무위키와 위키백과' 등의 여러 곳의 사전에서 발췌를 했습니다.
이야기의 내용이 다소 입증이 되지 않는 이야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그냥 고딩’입니다. 오늘은 고구려의 아래쪽에 존재해 고구려에게 압력을 받아 고대 국가로 성장하지 못한 고대 철기 국가였던 ‘옥저와 동예’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그러면 이야기를 시작 하겠습니다.
⦁ 옥저
▶ 개요
옥저는 동해안 함경도에서 간도 남쪽, 연해주에 이르는 광범위한 영역에 퍼져 있던 부족 국가 집단이었습니다. 옥저는 남옥저, 동옥저, 북옥저 등이 존재했지만 남옥저는 기원전 2세기말에 위만 조선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였고, 북옥저는 기원전 28년경 주몽이 부위염(개국 공신)을 보내어 정벌하였고, 마지막으로 동옥저는 신라국과 잠시 조공 관계를 맺었다가 57년경 태조왕에 의해서 정벌되었습니다.
- 존속 기간 : 기원전 3세기 ~ 224년(기원후 3세기)
- 북옥저는 정벌당한 후 고구려의 속국이 되었다.
- 간도 : 압록강-두만강 맞은편의 한민족(조선족) 집단 거주지를 지칭한다.
- 연해주 : 러시아 원동 지방에 있는 크라이주를 한자로 의역한 단어 이다.
▶ 정치 제도
옥저는 주변 국가인 고구려의 압력으로 연맹 왕국 단계로는 성장하지 못했습니다. 옥저의 사회는 군장(읍군, 삼로)이라는 지배자가 부족을 지배 했습니다.
▶ 사회 및 풍습
옥저는 토지가 비옥하여 오곡을 생산하였고, 어물과 소금 등의 해산물이 풍부했는데, 고구려에 소금, 어물 등을 공납으로 바쳤습니다. 옥저는 고구려와 같이 부여족의 한 갈래였으나 풍속은 달랐습니다. 대표적으로는 ‘민며느리제’, ‘골장제’, ‘가족 공동 무덤’이 있습니다.
- 민며느리제 : 신랑과 신부가 어릴 때 약혼을 한 뒤, 신부가 신랑집에서 일을 하다가 신랑이 신부집에 예물을 건네고 정식으로 혼례를 올리는 제도입니다.
- 골장제 : 시신을 산에 안치해두었다가 뼈를 추슬러가는 풍습입니다.
- 가족 공동 무덤 : 가족이 죽으면 시체를 풀이나 흙으로 가매장한 후에 나중에 그 뼈를 추려서 가족공동묘인 커다란 목곽에 안치하는 풍습입니다.
⦁ 동예
▶ 개요
동예는 기원전 3세기부터 3세기까지 오늘날 원산 부근의 함경남도 남부에서 강원도 강릉시 지역까지 동해안 영동 지역에 걸친 영역에 퍼져 있던 부족 국가 집단이었습니다. 북으로는 고구려와 옥저. 남으로는 진한에 접하였습니다.
- 존속 기간 : 기원전 3세기 ~ 기원후 3세기
- 멸망 가설 : ①고구려의 복속설, ②자연 멸망설, ③기타 요인설(앞의 2가지 가설을 죄외한 나머지 경우)
▶ 정치 제도
동예도 옥저와 마찬가지로 고구려의 압박에 의해서 연맹 왕국의 단계까지는 성장하지 못했습니다. 동예도 옥저와 동일하게 군장(읍군, 삼로)이 부족을 지배 했습니다.
▶ 사회 및 풍습
동예는 동해안에 해안을 끼고 위치한 까닭에 해산물이 풍부하며 그 외에도 ‘단궁’, ‘과하마’, ‘반어피’ 등이 특산물입니다. 그리고 산악 지형이 대부분인데도 불구하고 토지가 비옥하여 농경이 발달했다고 합니다. 제천 행사로는 10월의 무천이 있었으며 씨족 사회의 관습이 엄격히 남아 남의 마을을 침범하면 재물로서 보상하는 ‘책화’, 같은 부족 사람끼리는 혼인하지 않는 ‘족외혼’의 풍습이 있었습니다.
- 단궁 : 박달나무로 만든 활입니다.
- 과하마 : 나무 밑을 지나갈 수 있는 키 3척(작은 말)의 말을 말합니다.
- 반어피 : 반어피는 수·당대 이후로 해표(바다표범)의 가죽이라고 하였습니다.
- 책화 : 마을을 침범하면 재물로서 보상하는 제도입니다.
- 족외혼 : 같은 부족 사람끼리는 혼인하지 않는 풍습입니다.
옥저와 동예는 과거 한반도에 존재 했던 부족 국가였습니다. 역사를 공부 할 때에 옥저와 동예는 간단하게 배우고 지나갑니다. 그래서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어서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한반도의 남쪽에 존재했던 '삼한(마한, 진한, 변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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